일곱 왕 중 마지막...
이 글은 로마 역사 서술을 이어갑니다. 이전 장에서는 로마의 일곱 왕 시대를 살펴보았으며,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서서 왕정 시대가 끝난 이유를 탐구해야 합니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간략 개요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로마의 7번째 왕으로, 5번째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크스의 아들(혹은 손자)이었으며,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딸 툴리아와 결혼했습니다.
리비우스(Ab Urbe Condita I.46)에 따르면, 툴리아와 타르퀴니우스는 권력을 잡기 위해 공모했습니다.
👉 “툴리아는 살해된 아버지의 시신 위를 지나가며, 남편에게 왕으로서 처음 인사를 건넸다.”, 리비우스(Ab Urbe Condita I.46)
타르퀴니우스는 6번째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를 암살한 후 왕좌를 차지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길은 그의 운명을 미리 정해놓은 듯 보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흔히 반대자들의 처형이나 추방으로 이어졌습니다. 질문은 남습니다: 그는 원로원과 상의하기를 거부했는가, 아니면 원로원 자체가 두려움에 지배당했는가? 아마도 두 가지 요인의 혼합이었을 것입니다 — 왕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과 대중 반발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이 맞물린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위 사건들을 조금 더 명확히 해봅시다.
6번째 왕 살해에 대해…
- 타르퀴니우스(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로마의 7번째 왕)는 실제로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를 죽였습니다. 리비우스(Ab Urbe Condita, I.48)에 따르면, 타르퀴니우스는 무장한 지지자들과 함께 원로원에 들어가 왕좌에 앉았고,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항의하러 왔을 때 그를 원로원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렸습니다. 기록마다 타르퀴니우스가 직접 치명타를 가했는지, 아니면 그의 아내 툴리아 미노르가 부하들에게 길거리에서 마무리하도록 명령했는지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살인자가 정말로 피해자의 딸과 결혼했나요?..
- 네, 타르퀴니우스는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딸 툴리아와 결혼했습니다. 원래 두 사람은 각자 더 온화한 배우자와 결혼했었습니다(툴리아는 타르퀴니우스의 온화한 형과, 타르퀴니우스는 툴리아의 온화한 자매와 결혼). 디오니시우스(IV.28–30)에 따르면, 툴리아와 타르퀴니우스는 공모하여 각자의 배우자를 살해하고 서로 결혼했습니다. 악명 높은 툴리아 사건: 세르비우스가 살해된 후, 툴리아는 자신의 전차로 거리 위에 누운 아버지의 시신을 밟고 지나가며 자신의 몸을 피로 물들였다고 전해집니다 — 이는 최악의 형태의 친족 살해(parricidium)로 기억됩니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투리아 크루엔타(Tullia Cruenta, 피의 툴리아)’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겐 사실이 있나요?..
- 모든 것은 전설적 전통이며, 동시대의 확실한 증거는 아닙니다. 기원전 6세기 로마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리비우스(기원전 1세기 말)와 디오니시우스(동시대 로마에서 활동한 그리스인)가 주요 출처이며, 둘 다 구전과 연대기 전통에 의존합니다. 그들은 이를 사실처럼 서술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것이 확인된 역사가 아닌, 기억된 도덕적 교훈으로서의 폭정 이야기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로마의 7번째 왕은 어떻게 권력을 잡고 왕이 될 법적 권리를 침해했을까요?..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와 원로원
-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살해 후, 타르퀴니우스는 선거나 원로원 승인 없이 왕권을 장악했습니다. 리비우스(I.49)에 따르면, 그는 원로원에게 전통적인 자문 역할(consilium)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형과 제명으로 원로원 인원을 줄이고, 충성스러운 사람들로만 채웠습니다. 디오니시우스(IV.67)는 타르퀴니우스가 공포와 밀고자를 통해 지배하며 자문을 배제하고 반대를 억압했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한때 왕권 균형의 중심이던 원로원은 그의 명령에만 따르는 무력한 집회가 되었습니다.
그리스적 의미의 권력 탈취
- 그리스 정치 사상에서 τύραννος(tyrannos)라는 단어는 원래 '잔인한 통치자'가 아니라 합법적 혹은 세습적 권리 없이 권력을 잡은 개인을 의미했습니다. 나중에 '티란트'는 부정적 도덕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로마에서 가장 명확한 폭군/권력 탈취자의 예입니다:
- 그는 합법적 comitia curiata 선거가 아닌, 폭력과 음모로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는 모든 권한을 자신에게 집중하고 원로원의 조언을 무시했으며, 전통적 견제 장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임의적인 사법과 처형을 행했는데, 이는 그리스 정치 이론에서 폭정의 특징입니다.
타르퀴니우스가 스스로 취한 권리
- 원로원과의 상담 없음, 법령 비준 없음. 그는 독자적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타르퀴니우스는 사형 사건을 항소 없이 판결하며 전통적 항소권(provocatio)을 억압했습니다. 종교직을 공식적으로 변경하지는 않았지만, 제사장을 조작하여 통제했습니다. 본질적으로 타르퀴니우스는 그리스 폭군의 역할을 로마 맥락으로 전이한 존재였으며, 선출된 왕이 아닌 공포와 폭력, 집단적 권리 박탈을 통해 권력을 잡고 유지한 통치자였습니다.
이제부터 혁명을 정의로 접하게 됩니다...
맥락 속 사건의 연쇄:
스캔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 (기원전 509년경)
- 왕의 아들 섹스투스가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강간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아버지에게 범죄를 고발하고 자살했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혁명의 불씨가 되었고,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는 타르퀴니우스 가문에 맞서 국민을 결집시켰습니다. 이 범죄에 대한 분노는 섹스투스뿐만 아니라 타르퀴니우스 왕조 전체를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폭군으로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집단 행동으로 무너진 폭군:
- 로마인들은 이를 불공정한 통치자(rex)가 다른 군주가 아닌, 귀족이 주도하고 국민 분노가 뒷받침한 운동에 의해 추방된 순간으로 기억했습니다. 루크레티아의 자살은 상징적 원인이 되어 귀족(브루투스, 콜라티누스)과 로마인을 결속시켰습니다. 그리고 군중의 힘으로 로마의 7번째 왕은 타르퀴니우스 가문 추방, 왕정 폐지, 최초 로마 '레푸블리카(Res Publica)' 수립으로 이어졌습니다.
고대 역사가들은 이를 모범적 혁명으로 제시:
- 리비우스는 이를 자유와 폭정의 로마 기초 이야기로 제시합니다. 키케로는 이후 이를 liberatio patriae(‘조국의 해방’)라고 부릅니다. 디오니시우스는 이를 아테네에서 페이시스트라티드 추방과 같은 그리스 폭군 타도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 기록’ 주의:
- 사건 세부는 전설적이며, 우리의 출처는 수세기 후에 작성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사는 로마 혁명의 첫 역사적 기억으로, 후대에 전할 모범으로 보존되었습니다.
'권력 부재' 기간 (인터레그눔)
이제 우리는 왕의 몰락과 기원전 509년에 최초의 집정관이 선출되기까지의 '인터레그눔'(권력 공백기)과 초기 공화국 기관들이 회의와 통치를 어떻게 조직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추방된 직후, 로마에는 아직 왕도 없고 집정관도 없었습니다. 이 기간은 매우 짧았던 것으로 간주되며, 일반적으로 몇 주에서 몇 달 정도로, 로마인들이 지도 체계를 조직하고 선거를 준비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럼 어떤 이유로 로마 시민들은 도시를 통치할 권력을 재확립하게 되었을까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진화 기반의 계층 구조를 따릅니다. 역사적 맥락에서 목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폭군 추방 후 혼란 방지
- 권력 공백이 또 다른 군주제로 변하지 않도록 방지
- 새로운 체제의 정당성 확립
이 기간 동안 누가 통치했는가
- '인터렉스(Interrex)': 왕 사이의 사안을 관리하기 위해 임명된 임시 통치자. 각 인터렉스는 5일 동안 재임했습니다. 인터렉스의 주요 역할은 집정관 선거를 위해 센추리아 총회(comitia centuriata)를 소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직위는 귀족 상원의원들 사이에서 순환되며, 특정 가문이 과도하게 권력을 가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 동안 거의 무시되었던 원로원의 역할은 이 시기에 크게 변화했습니다:
- 연속성을 제공하고 인터렉스들에게 조언함
- 선거 절차 결정
- 군사 및 민간 사안이 붕괴되지 않도록 보장
인터레그눔 동안의 선거 절차
후보 지명:
- 주요 귀족들은 원로원에서 선택
- 기준: 혁명에 대한 충성, 군사적 지도력, 가문 명성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는 타르퀴니우스를 몰아낸 역할 때문에 자연스러운 후보였습니다.
총회 소집:
- 인터렉스가 Comitia Centuriata 소집
- 시민들은 센추리아(군사/재산 그룹)로 나뉨
- 각 센추리아는 한 표, 센추리아 내 다수결이 계산됨
투표 절차:
- 가장 부유한 센추리아부터 투표 시작(영향력 큼)
- 센추리아 과반수 지지 후보가 집정관으로 선출
- 두 번째 집정관도 동일 절차 반복
공식 승인:
- 결과는 인터렉스가 승인
- 원로원은 집정관에게 공식적으로 직무 조언 제공
시민 조직을 위한 조치
🟢 총회 소집:
- 공고(nuntiatio)로 시민을 소집. 시민들은 캠퍼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에 집결. 센추리아는 계급과 재산에 따라 물리적으로 배치
🟢 투표 및 절차:
- 인터렉스가 센추리아 순서 감독. 각 센추리아 내부에서 투표, 다수결 결정 후 공개 발표. 투표는 순차적이며 초기 센추리아가 이후 결과에 영향
🟢 원로원 역할:
- 집계 후 결과 승인. 인터렉스 감독을 통해 간접적으로 의장 역할 수행. 선출 후 집정관에게 조언 제공
권력 공백기 결과
🟢 성공적인 선거:
-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가 최초 집정관으로 선출
🟢 전환 완료:
- 인터렉스 퇴임. 원로원의 자문 권한과 시민 총회가 공화국의 기반으로 인정됨
🫱 핵심 원칙:
- 권력은 시민 총회와 원로원의 지도에서 나오며, 단일 통치자로부터 나오지 않음
👉 리비우스 I.59: “인터렉스는 국가를 유지하고, 시민을 투표에 소집하며, 집정관 선거를 수행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 특징 | 세부 사항 |
|---|---|
| 인터렉스(Interrex) | 임시 직위; 선거 권한 외에 임페리움 없음 |
| 기간 | 인터렉스당 5일, 집정관 선출까지 순환 |
| 권한 | 총회 소집, 후보자 발표, 투표 진행 |
| 감시 | 절차로 제한; 원로원 감독; 임기 매우 짧음 |
| 군사 문제 | 제한적; 즉각적 방어 필요 시 원로원에서 장군 임명 |
| 민간 행정 | 최소; 일상적 행정은 원로원 집단이 담당 |
| 종교 의식 | 인터렉스는 선거 정당성을 위해 점복(auspices) 수행 가능 |
이제 저자들은 존경하는 독자들에게 초기 로마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과 고대 그리스의 잘 발달된 민주주의 체계를 당시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비교를 탐구하도록 초대합니다.
아테네는 평등한 직접 투표를 강조했으며, 로마는 혼합 헌법(귀족 + 제한된 시민 영향력) 체제였습니다.
| 측면 | 그리스 (아테네) | 로마 (초기 공화국) | 출처 |
|---|---|---|---|
| 시민 참여 | 모든 남성 시민(18세 이상)은 에클레시아(Assembly)에서 투표 가능 | Comitia Centuriata(군사/재산 기반 센추리), Comitia Tributa, Concilium Plebis를 통한 투표 | 아테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II.1; 로마: 리비우스 I.59–I.60 |
| 원칙 | 직접 민주주의, 1인 1표 | 가중 투표; 부유한 센추리가 더 큰 영향력 보유; 귀족적 요소와 민중 요소의 결합 | 위와 동일 |
로마는 비상 권한(독재관)을 제도화했으며, 아테네는 집단적 책임과 추방제에 의존했습니다.
| 측면 | 그리스 | 로마 | 출처 |
|---|---|---|---|
| 지도자 / 행정관 | 전략가(장군)는 매년 선출, 재선 가능; 초기 아테네의 아르콘 | 집정관: 두 명의 선출된 임페리움 보유 마지스트라트 | 아테네: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I; 로마: 리비우스 I.59 |
| 권력 견제 | 전략가는 집회에 책임; 추방 가능; 아르콘 임기 = 1년 | 집정관 = 1년; 상호 거부권; 임기 후 책임 | 위와 동일 |
| 임시 절대 권력 | 정확한 대응 없음 | 독재관: 위기 시 최대 6개월 | 리비우스 II.6 |
두 시스템 모두 의회 + 집회 구조를 갖췄지만, 로마 의회는 귀족 중심, 그리스 의회는 추첨과 순환 방식으로 평등을 강조했습니다.
| 도구 | 로마 | 그리스 | 출처 |
|---|---|---|---|
| 상원 / 원로회의 | 상원(파트리키, 자문, 재정 및 외교 통제) | 부레(Boule, 500인 위원회, 추첨으로 선정, 집회의 안건 관리) | 로마: 리비우스 I.59–I.60;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II.1 |
| 집회 / 투표 | Comitia Centuriata, Comitia Tributa, Concilium Plebis – 마지스트라트 선출, 일부 법안 승인 | 에클레시아 – 모든 시민이 법령 투표, 전쟁 선포, 장군 선출 가능 | 위와 동일 |
| 행정 소집 | 권력 공백 시 Interrex가 집회 소집 | 집회 회의는 아르콘이 소집; 안건은 Boule이 준비 | 리비우스 I.59;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II.1 |
두 체계 모두 행정 권력에 대한 견제를 강조했으며, 로마는 공식 기관 거부권, 아테네는 사회/법적 메커니즘(추방제)으로 수행되었습니다.
| 도구 | 로마 | 그리스 | 출처 |
|---|---|---|---|
| 기소 / 책임 | 전 집정관은 임기 후 기소 가능; 평민 호민관이 마지스트라트를 거부할 수 있음 | 전략가 및 관리들은 집회에서 책임; 벌금, 추방 가능 | 리비우스 I.60;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II.1 |
| 권력 남용 견제 | 거부권(집정관 vs 집정관, 호민관 vs 마지스트라트), Interrex 감독 | 10년 추방제; 모든 시민 투표 | 위와 동일 |
그리스 민주주의는 기회 평등을 우선시했고, 로마는 안정성과 귀족적 통제를 우선시했습니다.
| 측면 | 그리스 | 로마 | 출처 |
|---|---|---|---|
| 의회 선출 방법 | 부레는 무작위 추첨(로티션), 매년 순환 | 상원 = 전 마지스트라트 / 파트리키; 집회는 센추리(재산/군사)에 따라 가중치 |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II.1; 리비우스 I.59 |
| 원칙 | 시민 평등, 모든 시민이 추첨으로 공직 가능 | 귀족 편향, 영향력은 재산/군사력에 의해 결정 | 위와 동일 |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 추측적 내용을 추가해 보겠습니다. 위 서술에서 현대 미국의 선거 제도가 초기 로마 공화국의 정치 설계 원칙과 밀접하게 관련된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제에서 벗어난 내용이지만, 일부 저자들은 이 부분을 꼭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대 미국의 선거 및 공화제 시스템은 초기 로마 공화국에서 개념적 영감을 받았지만, 매우 다른 맥락에 맞게 조정되었습니다. 구조화된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센추리 / 가중 투표 원칙
🟢 로마 (초기 공화국):
- 시민들은 재산과 군사 계급에 따라 센추리로 나뉘었습니다.
- 각 센추리는 Comitia Centuriata에서 하나의 공동 투표권을 가졌습니다.
- 부유한 센추리가 먼저 투표하여 결과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 이 시스템은 대중 참여와 귀족적 영향력을 균형 있게 조정하여 완전한 직접 민주주의를 방지했습니다.
🟢 현대 미국:
🟡 - 일부 학자들은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에서 개념적 유사성을 봅니다:
- 시민들은 주(state) 내에서 투표하며, 각 주는 정해진 수의 선거인단 투표(House + Senate 대표)를 가집니다.
- 각 주는 대통령 후보에게 공동 선거인단 투표를 행사합니다(대부분 주에서 승자독식).
- 인구가 적은 주는 상원 기반 요소로 인해 불균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 로마 센추리처럼 개별 유권자의 영향력은 단위 투표(센추리 또는 주 대표단)를 통해 매개됩니다.
- 대통령 투표는 주가 수행하며, 개별 시민이 직접 투표하지 않습니다.
- 작거나 영향력 있는 주는 불균형한 비중을 가질 수 있습니다(상원 + 하원의 조합을 통해).
시스템은 동일하지 않지만, 두 체계 모두 직접 투표가 아닌 중간 단위를 통해 투표 권한을 분배합니다.